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정선아리랑 가락에서 고려의 충신 전오륜 자취를 만나다.
전병현    
2012-11-01
조회
3499

정선아리랑 가락에서 고려의 충신 전오륜 자취를 만나다
[역사속의 강원인물, 그들이 꿈꾼 삶]

시대의 격변기, 절의(節義)를 위해 세상과 연을 끊다

-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이 말하는 채미헌 전오륜


■고려 멸망과 두문동 72현


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자신의 영달을 위해 항상 변신하여 고개를 내미는 이들
이 있기 마련이다. 이에 반해 드문 일이기는 하나 절의(節義)를 위해 세상과 연
을 끊는 사람들도 있다.


1392년 7월,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신하들의 운명은 갈렸다.
새 나라 조선의 개국을 찬미하며 공신이 된 이들이 있었지만 온갖 모함 속에서
도 고려 왕조를 사모하던 충신도 꽤 많았다. 시대의 격변기, 이들은 서로 다른
곳을 지향했고, 다른 길을 갔다.


“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”는 곧은 신념 하나를 목숨보다 더 높이 받
들었던 선비들은 태조(太祖) 이성계(李成桂)의 갖은 회유와 유혹을 뿌리치고 하
나 둘씩 개성을 떠났다. 그러곤 개성 동남쪽 고갯마루에 올라 과거 임금을 조회
할 때 착용하던 의관(衣冠)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평복과 삿갓으로 바
꿔 썼다. 이들이 함께 죽기를 맹서하고 들어간 곳은 경기도 개풍군(開豊郡) 광
덕면(光德面) 서쪽 산기슭에 위치한 두문동(杜門洞). 이때부터 두문동 괘관현
(掛冠峴)이라는 말과 `두문불출(杜門不出)'이라는 말이 생겨났다.


당시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 유신에 대한 기록은 `영조실록(英祖實錄)'을 비롯
해 `두문동선생실기(杜門洞先生實記)', `두문록(杜門錄)', `두문동 72현록(杜門
洞七十二賢錄)', `두문동실기(杜門洞實記)' 등 많은 문헌에 전하고 있다. 고려
왕조를 위해 절개를 지킨 이는 400여 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`두문동 72현'은 문
헌마다 정확하지는 않다. 우현보(禹玄寶), 조의생(趙義生), 고천상(高天祥), 전
귀생(田貴生), 이숭인(李崇仁), 원천석(元天錫) 등 당대 정상의 지식인들인 `두
문동 72현'에 대한 구체적인 행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. 훗날 영조와 정조에
의해 두문동 충신들이 `충절열사'로 복원되고, 개성에 표절사(表節祠)를 세워
복원하는 과정에서 그만 `72현'으로 굳어졌다는 게 일반적인 학설이다.


태조 이성계는 두문동에 은거한 신하들을 회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
않았다. 개성에 과거 시험장을 열어 개성의 학자들을 새 왕조 체제로 끌어들이
고자 했다. 그러나 시험 날 과장에는 개성의 대족(大族) 50여 가문 가운데 한
사람의 유생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.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인
`부조현(不朝峴)'이라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. 그 후 조선시대 내내 개성에서는
향시와 같은 초급 시험을 제외하고 어떠한 과거 시험도 열리지 않았다.


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불출한 72명의 충신 대부분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여생
을 보냈다. 그들 가운데는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두메산골로 숨어든 이들
이 있었다.


■전오륜, 정선 서운산에 은거


전오륜(全五倫)이 정선에 은거한 때도 이 무렵이다. 전오륜은 정선(旌善)이 본
관으로 자는 중지(仲至)이고 대제학 분(賁)의 아들이자 문하시랑평장사(門下侍
郞平章事) 우화(遇和)의 손자였다. 어려서부터 총명한 그는 공민왕(恭愍王) 때
에 문과에 급제해 고려의 마지막 공양왕(恭讓王) 때 정삼품인 우상시(右常侍),
좌산기상시(左散騎常侍), 형부상서(形部尙書), 대제학(大提學)을 지냈다. 목은
(牧隱) 이색(李穡)과 포은(圃隱) 정몽주(鄭夢周) 등과 교분을 맺으며 학문적 깊
이를 더하기도 했다.


국정이 혼미할 때 전오륜은 포은과 더불어 연명으로 탄핵하고 상소하여 정사를
바로잡고자 했다. 법이 문란하고 혼란할 때 이러한 그를 가리켜 목은은 “도
(道)에 뜻함이 있다”고 극찬했다. 간성왕(析城王, 공민왕의 시호) 말에 이성
계, 정도전, 이방원, 조준, 남은 등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충신들을 결당모란
죄(結黨謀亂罪)로 몰아 파직 유배시켰는데 그 속에는 목은 이색과 전오륜도 있
었다. 고려의 운이 다한 것을 안 전오륜은 만수산 두문동에 들어 망복지신(罔僕
之臣)으로 절의를 지키리라 다짐했다.


얼마 후 전오륜은 정선으로 갔다. `두문동실기'에는 `全五倫隱瑞雲山'이라고
해 전오륜이 서운산에 은거했음을 말해준다. 서운산(瑞雲山)에 든 전오륜은 고
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 죽은 백이숙제(伯夷叔齊)를 흠모해 호를 채미헌(採薇
軒)이라고 했다. 나무로 엮은 움막에 살면서 곧은 절의를 마음에 새겼다. 외출
할 때는 항상 패랭이를 눌러쓰고 다녔다. 나라를 잃은 죄인이 어찌 해를 보겠느
냐는 이유에서였다.


그는 매월 삭망일이면 조복을 입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송도 쪽을 바라보고
통곡하며 시를 읊었다. 전오륜이 지었다고 하는 한시는 시대를 통탄하고 세상
과 인연을 끊었다는 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글로 `전고대방(典故大方)'과 `
경현사지(景賢祠誌)'에 전해 내려온다.


東來朝服在臣身
遙望松京淚滿巾
唐虞世遠吾安適
矯首西山繼絶塵


정선으로 가져온 관복 몸에 걸치고
송도를 바라보니 구슬프기만 하네
당나라 우나라 세상 멀어지니 내 어디 가 리요
서산을 향해 머리 들어 세상과 인연 끊었 네


■거칠현동과 정선아리랑


그가 절개를 지킨 골짜기는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(居七賢洞)이다. 정선
읍에서 40여 리쯤 남쪽 쇄재 너머 백이산(白夷山)과 서운산(瑞雲山) 아래에 있
다. 마을에는 칠현사(七賢祠)가 있고 전오륜과 함께 이곳에서 은거했다는 김충
한(沖漢) 고천우(高天祐) 이수생(李遂生) 신안(申晏) 변귀수(邊貴壽) 김위(瑋)
의 이름이 새겨진 칠현비(七賢碑)가 있다. 두문동에서 피해온 일곱 명의 고려
유신을 기리기 위해 1985년 6월 정선 조양회에서 세운 비석이다.


칠현사 뒤쪽의 고려유신비에는 칠현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. 이들의 시는 기
울어진 천지에 남은 한 가닥 빛과 같았다. 쓸쓸한 삶 속에서 나라 잃은 슬픔과
삶의 무상함을 읊은 한시는 훗날 마을 사람들의 애조 띤 가락에 실려 어우러졌
고, 사람들의 정서에 자리 잡았다. 한 맺힌 가락이 풀어지면서 주변 사람들은
다시 거기에 저항과 망향, 한탄과 체념, 사랑과 애증을 소리로 담아냈을지도 모
른다.


마을 입구에 선 표석이 말해주듯 거칠현동은 어느새 `정선아리랑의 발상지'로
알려지게 되었다. 구비문학의 특성상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정선아리랑 가락은
그렇게 민중 속에서 싹터왔으리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요 믿음이다. 이 때문에
거칠현동은 정선아리랑이 태동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. 그리고 그 소리는 오
늘 다시 정선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넘나들고 있다.


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
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
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
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


■굴절하지 않은 시대정신 투영


“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…”는 3,000여수가 넘는 정선아리랑 노랫말 가운데
가장 대표적인 가사라고 할 수 있다. `만수산'은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에 있는
산이요, `먹구름'은 왕조의 위기를 뜻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. 정선아리랑
이 바로 거칠현동에 머물던 채미헌과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주는 가락이라고
할 수 있다. 이 때문에 정선아리랑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전오륜을 비롯한 7현
이 정선아리랑을 처음 불렀을 것이라는 설을 낳게 되었고, 세월이 흐르며 거칠
현동은 `정선아리랑의 메카'로 자리 잡았다. 1971년 정선아리랑이 강원도무형문
화재 제1호로 지정된 이후에도 이따금씩 발상지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으나 칠현
이 자신들의 심정을 한시로 지어 정선아리랑을 처음 불렀으리라는 두터운 믿음
과 애정에 묻혀버리고 말았다.


정선아리랑에서는 전오륜의 자취를 만날 수 있다. 6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
도도한 시대정신의 흐름 앞에서 굴절하지 않은 참모습의 정표가 노랫말에 올올
이 맺혀 있다. 난세를 개탄하고 고통과 서글픔 속에 한 많은 세상을 노래한 전
오륜, 게다가 거칠현동이 있어 정선아리랑의 가치가 오늘 더욱 빛난다.


/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 프로필/


■1963년 정선군 신동읍 출생
■인하대, 인하대 대학원 졸업(비교언어학 전공)
■정선아리랑연구소장, 강원도문화재전문위원
■시문학 추천(1985), 심상 신인상(1985), 국민포장 기록관리부문(2009년)
■1985년 시 `라지브 마을의 새벽'으로 등단. `정선아리랑', `중국 조선족 아리
랑 연구', `러시아 고려인 아리랑 연구', `일본 한인 아리랑 연구' 등 아리랑
연구서와 지명, 민속 등 47권의 저서 출간
출처: 강원일보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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